스포츠 담긴 책장
나는 운동화가 없어도 달릴 수 있습니다.
무지개
저 하늘 무지개 바라보면 내 가슴 기쁘게 뛰노네. 나 어릴 적에도 그러했고 다 자란 지금도 그러하고 더 늙은 나중도 그러하리. 아니면 죽음이 더 나으리!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 내 삶 남은 모든 날들이여 자연의 경외감으로 엮여지기를. 윌리엄 워즈워스, 최의창 옮김
나는 모범적인 제자이거나 또는 기회주의자라서 뭘 또 얻어 보려고 교수님이 주신 시를 빤히 쳐다보았다. 가만 보자… 무지개 보고 기쁘면 기쁜 것이지 참 결연하기도 하다. 저렇게 결연해서 기쁠 수 있다고? 이 시인은 무지개 보고 기쁜 마음에 왜 이렇게 집착하는 걸까?(쓸데없는 질문은 때로 쓸모 있는 영감을 준다.)
이 시는 18세기 영국 시인, 워즈워스의 무지개라는 시다. 워즈워스는 영국의 낭만주의 문학을 이끌었던 문예가다. 낭만주의 문학은 형식과 이성을 중시했던 이전 시대의 환멸에서 시작되었다. 산업혁명이 불러온 기계화와 자연을 분석하려드는 과학의 발전을 경계했다.
워즈워스가 과학을 싫어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누군가 무지개를 빛의 굴절과 반사 원리로 분석하기는 하면서 가슴 속에 기쁨은 느끼지 못한다면, 격렬하게 안타까워했을 것 같다. “죽음이 더 나으리!” 하면서.
세상에 모든 물질은 단순히 과학 분석으로는 알 수 없는 넓은 세상을 담고 있다. 그러나 마주한다고 모두에게 드러나는 것도 아니고, 모두에게 같은 세상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모두가 같은 세상을 산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나에게 드러나는 세상을 살 뿐이다. 사실은 모든 존재(물질)가 모든 존재(사람)에게 드러나는 세상이 얽히고 연결되어 있는 것이 이 세상이다. 간혹 두 사람이 다른 세상에 사는 것 같은 느낌은 거짓이 아니다.
나만의 세상만 살거나 과학의 세상에만 갇혀 살기에 한 번 뿐인 우리 인생이 너무 아깝다. 워즈워스가 격한 지점도 이곳이 아닐까? 무지개는 과학의 세계 말고도 우리에게 다양한 세상을 드러내주니까. 우리가 알만한 놀라운 세상이 세상에 넘쳐난다.
고흐가 그린 구두는 하이데거에게 촌 아낙네의 삶을 드러냈다.
이 구두라는 도구의 밖으로 드러난 내부의 어두운 틈으로부터 들일을 하러 나선 이의 고통이 응시하고 있으며,
구두라는 도구의 실팍한 무게 가운데는 거친 바람이 부는 넓게 펼쳐진 평탄한 밭고랑을 천천히 걷는 강인함이 쌓여 있고, 구두가죽 위에는 대지의 습기와 풍요함이 깃들여 있다. 구두창 아래는 해 저물녘 들길의 고독이 깃들여 있고, 이 구두라는 도구 가운데서 대지의 소리 없는 부름이 또 대지의 조용한 선물인 다 익은 곡식의 부름이, 겨울들판의 황량한 휴한지 가운데서 일렁이는 해명할 수 없는 대지의 거절이 동요하고 있다. 이 구두라는 도구에 스며들어 있는 것은, 빵의 확보를 위한 불평 없는 근심과 다시 고난을 극복한 뒤의 말 없는 기쁨과 임박한 아기의 출산에 대한 전전긍긍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의 전율이다. 이 구두라는 도구는 대지에 속해 있으며, 촌 아낙네의 세계 가운데서 보존되고 있다. 이 보존된 귀속으로부터 도구 자체의 자기 인식이 생긴다.
-예술작품의 근원 중, 오병남 옮김-
그리고 21세기, 마라톤이 열리는 어느 날, 베를린 시청 근처에 버려진 운동화 한 켤레가 놀라운 세상을 우리에게 드러냈다. ‘나는 운동화가 없어도 달릴 수 있습니다’
공정무역이라는 큰 주제로 전개되는 이야기 속에 다양한 이슈와 정보들이 담겨 있는데, 중간 중간 토막 정보들도 매우 흥미롭다. 예를 들어, 마라톤의 길이가 왜 애매하게 42.195킬로미터가 되었을까? 1908년 런던에서 올림픽이 열렸을 때 영국 공주가 궁전에서 창문 밖으로 마라톤 경기를 보고 싶어 했다고 한다. 경기 위원회는 하는 수 없이 마라톤 코스를 궁전 주변으로 설계해야했고, 그렇게 설계된 코스가 42.195킬로미터였단다.
공정무역, 공정노동, 난민, 스포츠, 운동화의 역사와 과학 원리, 마이클 조던은 어쩌다 아디다스가 아니라 나이키를 신게 되었는지 등등… 스포츠와는 뗄 수 없는 운동화. 버려진 한 짝의 운동화가 담고 있는 세계로의 탐험. 기자로 활동하며 청소년 교양서를 써온 볼프강 코른의 ‘나는 운동화가 없어도 달릴 수 있습니다’를 읽어보자.
신발의 주인을 찾아서, 온주로
그런데 신발에 이상한 상표가 붙어 있었다. 아비바스! 아디다스와 똑같이 생긴 운동화였다.
…나는 다시 호텔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수첩에 몇 가지 발견한 것들을 적었다.
냄새의 진원지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내가 받아 온 운동화에서 나는 것이었다. 접착제와 용해제의 냄새가 지독했다.
그제서야 나는 공장에서 무엇을 보지 못하고 왔는지 뒤늦게 알아챘다. 접착부!
-p.445
공장에는 마스크를 쓰고 독가스를 조심하라는 현수막이 걸려있지만
어느 누구도 그것을 따르지 않는다고 했다.
특히 새로운 접착제와 섞기 위해 용해제의 뚜껑을 열 때가 제일 힘들어서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근로자가 기절해 근처의 병원으로 실려 간다고 했다.
그런데도 나란히 붙어 앉아 접착하는 일을 하는 근로자들은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 일한다.
-p.99
슈미트씨가 그 말을 듣고 깜작 놀랐다.
“그렇게 하면 안 돼요. 접착제를 분무기로 분사하려면 용해제를 많이 섞어 줘야 해요.
그럼 다른 물질과 섞여 강한 반응을 일으켜 사람의 간에 손상을 주는 디메틸포름아미드와 같은
위험한 성분이 나와요. 그런 용해제는 공장 부지에서 증발되지 않은 채
요리조리 빠져 나가다가 나중에는 신발에 잠복해 있어요.
그리고 그 신을 신는 사람의 발까지 침투해요.”
-p.166
우리가 사용하는 많은 제품들이 중국이나 동남아, 아프리카에서 생산된다. 인건비가 저렴하기 때문에 기업들은 이곳에 공장을 세우는 것이 아무래도 이득이다. 산업은 결국 이윤을 추구하려는 기초적인 욕망의 작용이다. 문제는, 이 욕망의 추구가 간혹 위생과 안전, 인간 존엄의 감각을 상실케 한다는 것이다. 별 생각 없이 돈 주고 사서 잘 신고 있는 운동화에 아프리카 어린이의 삶과 건강이 갈려있을지도 모른다.
신발의 주인을 찾아서, 에티오피아로
여기서부터 이 운동화는 베르너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제국주의적 플렌테이션(원주민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는 강대국의 대농장 경영 착취)과 젠트리피케이션(강제 이주), 아프리카 난민, 운동선수의 노예계약 등이 얽혀있는 불편한 진실의 세계를 보여준다. 이 모든 세계가 운동화 한 켤레에 담겨 있다니.
19세기가 되면서 산업국가들이 그들의 전략을 바꿨다.
아프리카에서 직접 약탈하기 시작했고, 아프리카 대륙을 점점 식민지로 만들어 버렸다.
19세기와 20세기 초, 아프리카는 원자재, 양념, 이국적인 제품들의 최대 공급처가 되었다.
20세기가 되면서 점점 더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하자,
국제무역은주로 유럽, 북미와 아시아 지역으로 무대를 옮겨 갔다.
그 결과 아프리카는 버려진 대륙이 되었다. 아프리카의 나라들은 혼돈에 빠져들었고,
열악한 기간 시설 탓에 전 세계에 퍼져 나간 인터넷도 아프리카를 지나쳐 버렸다.
지하자원이 풍부한 아프리카 대륙이 이제는 원자재 창고와 부자 나라의
쓰레기매립지로서의 역할만 수행하게 되었다.
- p.223
착한 소비
내가 아무리 학자금 대출을 갚고 있는, 월 200만원 버는 비정규직 노동자라곤 하지만, 100년 이전의 아무 시대에나 살고 있다면, 카페에서 향긋한 커피를 마시며 감성 폭발하는 맥북으로 이렇게 편안히 글을 쓸 수 있었을까?
만족감이야 상대적 비교의 산물이거나 정신승리겠지만, 내가 이 시대라는 선물을 거저 받았으니 나도 후대에게 더 나은 시대를 물려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여전히 부조리하고 불공정하기 때문에, 내가 누리는 당연한 사회적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다. 아니면, 내가 누리는 만큼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커피는 선진국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기호식품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커피 농장의 농부들은 가난하다. 세계 커피의 3분의 1을 공급하는 브라질의 커피 농장에는 노예노동자들이 매년 구출되고 있다. 아프리카 커피 농장에는 빈민가 어린이들이 여전히 착취당하고 있다. 내가 아무리 커피를 많이 사먹어도 커피콩을 따는 사람들은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다행히도 요즘은 커피 농부들의 착취적 구조를 타개하고자 커피 공정무역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네스프레소와 같은 대기업들도 공정무역 운동에 동참하는 추세다. 소비자로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요즘 카페들을 가보면 fair trade 등 공정무역 커피를 사용한다는 표지를 볼 수 있다. 돈을 조금 더 내더라도 공정무역 커피를 마시려는 노력은 결코 덧없지 않다. 기업은 결국 소비자의 선호를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착한 소비의 노력은 커피 농장에서 착취당하는 어린이를 학교로 보내줄 수 있다. 나의 소비 습관이 빈민국 노동 착취를 촉진할 수도 있고 억제할 수도 있는 것이다.
더 많은 세상을 보고, 더 넓은 세상을 살기를
그 뿐이랴, 나는 길가다 노을을 보면 발걸음을 멈추는 여자친구가 지나치게 감상적이라고 생각했다. 겨울은 겨울이라고 여름은 여름이라고 바다를 보러 가고 싶어 하는 여자친구가 지나치게 감상적이라고 생각했다. 우연히 형성된 구름이 아름다워서 매일같이 하늘을 보는 여자친구가 지나치게 감상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자친구는 나보다 더 많은 세상을 보고 더 넓은 세상에 살고 있었고, 나는 그런 세상이 있는지도 모르는 무지에 갇혀있었을 뿐이다.
앞으로는 마주하는 모든 물질이 나에게 더 많은 세상을 열어줄 수 있도록 넓은 시야를 가져 보리라. 인생은 올인하는 게 아니다. 21세기 인생은 우물이 아니니까. 한 분야에 올인한다고 성공이 보장될까? 단순 작업형 직업은 거의 사라진 시대가 되었다. 세상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우리에게 펼쳐지는 세상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우물도 깊게 파려면 넓게 파야 한다. 나만의 세상에 갇혀 살거나, 내가 아는 세상이 전부라는 환상에서 빨리 벗어나자. 그렇지 않으면, 여자친구를 지나치게 감상적이라고 오해할 수 있으니까.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독서지.
글. 한국교육개발원 임한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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